2019. 06. 18. 빈에서의 첫 공연 관람
많은 사람들이 내가 빈으로 옮기자 공연 많이 보러 다니겠다고, 축하한다고 말해주었는데, 사실은 공연 관람에 흥미를 잃은 지 일 년 정도 되었다. 서울에 있을 땐 몸과 마음이 지쳐있었던 상태이기도 했는데, 빈에 와서도 딱히 찾아서 보러 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더라. 좋은 공연이 널려있으니 언제든 가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인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평생에 한 번 볼까 말까 한 극에 달한 좋은 공연을 이미 몇 번 봐서일까? 내가 정말 좋아하는 피아니스트 안드라스 쉬프 (András Schiff)가 빈에서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26번 E flat 장조 "고별"을 연주하는데도 가지 않을 정도였으니, 당분간 마음이 시키는 대로 공연 관람에서 조금 멀어져 있기로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마트에서 장을 보고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 포스터를 보게 되었는데...
무려 필립 헤레베헤 (Philipe Herreweghe)가 콜레기움 보칼레 겐트 (Collegium Vocale Gent)를 이끌고 와서 바흐의 B단조 미사곡을 연주한다! 다른 건 몰라도 이건 놓칠 수가 없는 공연이었다.
바흐의 마태수난곡 (Matthäus-Passion, BWV244)을 들을 땐 항상 헤레베헤와 콜레기움 보칼레 겐트의 연주만을 듣는다. (링크) 2017년 헤레베헤와 샹 젤리제 오케스트라가 서울에서 연주한 베토벤 교향곡들은 지금까지 들은 베토벤 교향곡 중에 최고였다. 앞으로도 그만한 연주는 듣지 못할 것이다. 그런 헤레베헤가 다른 곡을 연주해도 넋이 나갈 텐데, 바흐 B단조 미사곡이라니! 사라져 가던 공연 관람에 대한 욕구를 되살리기에 충분했다.
어제부터 가득 찬 일정으로 수업을 듣는 중인데, 빠른 시일 내에 제출해야 하는 과제가 있어서 오늘 수업이 끝난 후 조모임을 했다. 생각보다 길어져서 공연에 못가나 싶었는데, 저녁은 못 먹겠지만 표는 살 수 있는 시간을 남기고 끝이 났다. 집에 가서 온라인으로 하잔다.
Wiener Musikverein, Musikvereinsplatz 1, 1010 Wien (구글지도 링크)
공연장은 빈 음악협회다. 정식 명칭은 Gesellschaft der Musikfreunde in Wien인데, 한국어로 직역하면 빈 악우협회. 독일 뮌헨에서는 가슈타익 (Gasteig)과 왕궁 헤라클레스 홀 (Herkulessaal in der Residenz) 모두 공연 한두 시간 전부터 Abendkasse를 열어 당일 공연 티켓을 정가보다 싸게 파는데, 이곳 빈 음악협회의 매표소는 Abendkasse 없이 09:00-20:00 판매한다고 한다. 독일에서처럼 Abendkasse 할인을 기대하고 갔는데, 정가를 다 주고 구입할 수밖에 없었다.
빈 음악협회의 2019/2020 시즌 공연 팸플릿을 챙기고 들어가려는 순간, 반바지를 입고 온 것을 깨달았다. 유럽에 와서 공연 관람한 지 너무 오래되긴 했나 보다. 이런 기본적인 것도 잊고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남자 중엔 나만 반바지다. 어쩔 수 있나. 다음부터 잘 챙기면 되지 뭐.
오늘의 공연은 음악협회 대공연장 (Große Musikvereinsaal), 일명 황금홀 (Goldene Saal)이라 불리는 그 유명한 곳.
공연은 예상했던 대로 최고였다. 음향이 정말 좋아 적은 수의 시대악기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으로도 공연장을 충분히 울렸고, 내가 사랑하는 시대악기들의 음색을 두 시간 동안 들을 수 있다는 것은 지극한 행복이었다. 바흐의 음악은 기도문과 이보다 더 잘 어울릴 수 없고, 헤레베헤의 해석은 마음을 울리고, 솔리스트들의 음색은 그 감동의 적절한 매개체가 되었다. 알토 솔로를 맡은 카운터 테너의 음색이 정말 맑은데, 음량도 정말 커서 이래서 그 옛날에 카스트라토를 만들었나 싶었다. (원인은 다른 곳에 있었지만.)
거장의 훌륭한 연주에 기립박수로 화답하는 빈 시민들. 몇 번의 커튼콜 후에 오케스트라와 합창단 단원이 퇴장하고서도 박수를 멈추지 않아 결국 헤레베헤와 솔리스트들을 한 번 더 무대로 불러내었다. 좋은 연주에 이렇게 열렬히 화답하는 것은 당연한 것. 빈에 와서 처음으로 본 연주가 이 정도로 좋았으니, 당분간 또 공연을 보러 가지 않아도 이 기분을 음미하며 지낼 수 있을 것 같다. 그래도 집에서 나가서 조금만 움직이면 이런 좋은 공연들이 열리는 곳이 많으니, 자주는 못 가더라도 꾸준히 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