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 Rachmaninoff - Rhapsody on a Theme of Paganini, Op.43
사람의 기억력이란 참으로 잔망스러워서 보통 어떠한 책을 읽으면 맨 앞과 맨 뒤의 내용만 기억난다고 한다. 언제 읽었는지, 누가 집필했는지도 기억 안나는 음악통론도 나에게 그러한데, 대체 무슨 내용이 있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고 맨 앞만 기억이 나는 것이다. 음악통론인만큼 음악에 대한 정의로 시작했는데, '음악이라는 것을 쉽게 정의할 수 없지만, 한 가지 확실한 점은 변화하지 않는 것은 음악이라 할 수 없는 것이다.'라는 내용이었다. 음정, 박자, 리듬, 화성, 음색 등이 변화하지 않으면 우리가 음악이라고 하지 않는 다는 것. 예를 들어 자동차 경적소리는 음정과 음 길이를 가지고 있지만, 그 자체로는 음악이 될 수 없다. 만약 우리가 2002년에 자동차에서 '빵 빵-빵 빵 빵'으로 음 길이와 리듬을 변화시킨 것을 듣는다면, 이것은 어느 정도는 음악의 범주 안에 든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 저 리듬 뒤에 '오 필승 코리아' 노래가 자연스레 이어지는 것을 보면...)
많은 음악 형식 중에 제일 직관적인 것을 꼽으라고하면 변주곡이 아닐까 싶다. 변주곡이야 말로 하나의 음악적 주제를 가지고 계속 변화시키는 것이니 말장난으로라도 음악 중에서도 제일 음악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 옛날 음악이 어떻게 태동했는지 상상해본다면, 아무래도 어떠한 논리 구조를 가진 음악 형식보다는 변주곡이 먼저 나타나지 않았을까 싶다. 인간이란 보통 가지고 있는 것을 이렇게 저렇게 바꾸고 싶어 하기 마련이니까.
오늘의 곡을 이야기하기 전에 대중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변주곡들을 짚고 넘어가려면, 아무래도 요한 파헬벨(Johann Pachelbel, 1653-1706)의 '세 대의 바이올린과 통주저음을 위한 카논과 지그 라장조 (Kanon und Gigue in D-Dur für drei Violinen und Basso Continuo)' 중 카논으로 시작해야할 것이다.
파헬벨의 카논은 샤콘느(Chaconne) 형식의 변주곡인데, 샤콘느에 대해서는 따로 더 자세히 이야기하도록 하겠다. 그리고 또 잘 알려진 변주곡으로는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Johann Sebastian Bach, 1685-1750)의 '골드베르크 변주곡 BWV988 (Goldberg-Variationen, BWV988)'이 있다.
2016년 10월 23일에 서울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에서 쉬프의 리사이틀이 있었는데, 2부가 바로 이 골드베르크 변주곡이었다. 단언컨대, 앞으로도 그 어디에서도 그만한 연주는 들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때 그 장소에 있었던 것은 엄청난 행운이었다. (쉬프 자신도 그 날 자신이 엄청난 연주를 했다는 것을 안다는 걸 관객석에서 느낄 수 있었다.) 바흐는 바로크 시대의 작곡가로, 바로크 시대에는 연주자가 자유롭게 곡에 장식음을 넣어서 연주하는 것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에, 처음 연주되는 아리아 주제를 들어보면 트릴과 꾸밈음들로 음들이 장식되어 있는 것을 들을 수 있다. 그리고 이어지는 30개의 장대한 변주들 후에 다시 아리아 주제가 돌아오는데, 쉬프는 여기에서 모든 꾸밈음을 없애고 연주한다. 즉, 그 모든 변주 후에 곡 전체의 순수한 근본을 군더더기 없이 드러내며 곡을 끝맺는데, 실제로 들으면 마지막 아리아에서 형용할 수 없는 감동을 받게 된다. 물론, 그날의 공연은 플러스알파의 감동이 있었고. 아, 진실로 이것은 어떻게 글로 전달할 수가 없는 감정인 것이다. 결국 그 날 같이 감상한 친구들과 공연의 감동을 계량하는 단위를 만들었으니 바로 ASG - András Schiff Goldberg 다. 2016년의 공연이 1 ASG로 우리들이 가는 모든 공연의 척도가 되고 있다. 물론 전하량의 단위 쿨롱(C)과 같이 실생활에서는 mASG가 주로 쓰이는 편.
그리고 제일 유명한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 1756-1791)의 '프랑스 민요 "아, 어머니께 말씀드리죠"에 의한 열두개의 변주곡 KV265 (Die Zwölf Variationen über das französische Lied „Ah, vous dirai-je, Maman“ KV265)'을 빼놓을 수 없다.
무슨 말이 필요하랴. 피아노를 조금 배워본 사람이라면 다 아는 곡일 테고, 피아노를 배우지 않은 사람이라도 아는 그 멜로디!
대부분의 사람들은 멜로디, 리듬, 화성 등을 변화시키는 변주만 생각하는데 음색을 변화시키는 것도 변주에 해당이 된다. 모리스 라벨(Maurice Ravel, 1875-1937)의 '볼레로(Boléro)'가 바로 음색을 변화시키는 변주의 가장 유명한 예이다.
위의 네 곡을 들으면 깨달을 수 있겠지만, 변주곡 감상의 재미는 바로 주제를 듣고 각각의 변주가 주제에서 어떻게 변주되었는지를 듣는 것이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서,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Sergei Rachmaninoff, 1873-1943)의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광시곡, 작품번호 43번 (Rhapsody on a Theme of Paganini, Op.43)'에 대하여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라흐마니노프는 그 자신이 위대한 피아니스트였기 때문에 주로 피아노 곡을 많이 남겼는데, 이 곡과 함께 대중적으로 알려진 곡으로는 '피아노 협주곡 2번 다 단조, 작품번호 18번'과 영화 '샤인'을 통한 '피아노 협주곡 3번 라단조, 작품번호 30', '14개의 노래, 작품번호 34 중 "보칼리제"' 등이 있다. 라흐마니노프도 여느 다른 작곡가와 마찬가지로 파가니니의 '독주 바이올린을 위한 카프리스 제24번 가 단조, 작품번호 1번 (Caprice No. 24 in A minor for Solo Violin, Op. 1)에 매료되어 이 곡을 주제로 변주곡을 작곡한 것이 바로 이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광시곡이다.
니콜로 파가니니(Niccolò Paganini, 1782-1840)는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넘겼다'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뛰어난 바이올린 테크닉의 소유자였는데, 동시대의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였던 프란츠 리스트(Franz Liszt, 1811-1886)는 1832년 4월 20일에 프랑스 파리에서 있었던 파가니니의 연주회에 갔다가 엄청난 감명을 받아 '나는 피아노의 파가니니가 되겠다'라는 목표를 세우고 정진하게 된다. 파가니니의 열렬한 추종자였던 그는 파가니니의 곡들을 모티브로 한 여러 곡들을 남긴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파가니니의 '바이올린 협주곡 제2번, 작품번호 7번 (Violin Concerto No. 2, Op. 7)'의 3악장을 기반으로 한 곡인 '파가니니에 의한 대연습곡 S. 141 (Grandes études de Paganini, S. 141)'의 세 번째 연습곡 '작은 종(La Campanella)'이다.
리스트의 파가니니에 의한 대연습곡은 총 6개의 연습곡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마지막 6번이 바로 오늘의 주제 파가니니 카프리스 24번을 기반으로 한 곡이다.
리스트뿐만이 아니라 브람스도 카프리스 24번 주제로 변주곡을 작곡했다. 도대체 이 곡의 어떤 점이 수많은 작곡가들을 매료시켰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라흐마니노프도 이 곡의 마술에 걸려 변주곡 형식의 피아노 협주곡을 작곡했다.
아래 영상이 오늘의 메인 영상.
위에서 2016년 10월 23일의 쉬프 연주회를 언급했으니, 동년 10월 31일의 연주회도 언급하지 않고 지나갈 수 없다. 성남아트센터에서 발레리 게르기예프(Valery Gergiev)와 마린스키 극장 심포니 오케스트라(Mariinsky Theater Symphony Orchestra)의 연주회가 있었는데, 이날 솔리스트로 나온 이가 바로 손열음이었다. 협연곡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Dmitri Shostakovich, 1906-1975)의 '피아노, 트럼펫과 현악 오케스트라를 위한 협주곡 다 단조, 작품번호 35번 (Concerto in C minor for Piano, Trumpet, and String Orchestra, Op. 35)'이었고, 실로 어마어마한 연주였다. 지금껏 본 손열음의 연주 중에 단연 최고였던 공연.
러시아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마린스키 극장은 모스크바의 볼쇼이 극장과 함께 러시아 발레의 양대산맥이다. 세계적 지휘자 게르기예프와 마린스키 오케스트라가 만들어내는 러시아 사운드는 그야말로 압권이다. 러시아의 혹독한 음악교육으로 다져진 오케스트라 연주자들의 말도 안 되는 테크닉과 정교함이 어마 무시한 힘과 속도로 밀어붙이는 게르기예프의 해석과 만나면 보통의 정제된 음악만 듣던 사람들은 기절초풍할 수밖에 없다. (여기에 데니스 마추예프(Denis Matsuev)까지 가세하면 거의 무아지경에 이름.) 게르기예프는 2016년 8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손열음과 함께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Sergei Prokofiev, 1891-1953)의 '피아노 협주곡 제2번 사 단조, 작품번호 16번 (Piano Concerto No. 2 in G minor, Op. 16)'을 연주하고 “내가 평생 공부한 걸 젊은 손열음이 이해하고 치더라. 놀라웠다”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동년 10월 성남아트센터 연주도 그렇고 아무래도 손열음이 러시아 음악 해석에 무언가가 있긴 한가보다.
라흐마니노프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러시아 출신이다. 잘 웃지 않는 러시아 사람들 중에서도 라흐마니노프는 더 조용하고 어두운 사람이었다고 전해진다. 교향곡 1번을 발표한 후에 평단의 융단폭격을 받은 그는 우울증도 가지게 된다. 교향곡 1번 이후의 슬럼프는 정신과 의사 니콜라이 달의 치료로 극복하였지만 (그렇게 극복하고 쓴 곡이 바로 피아노 협주곡 2번. 니콜라이 달에게 헌정하였다.) 우울감은 라흐마니노프와 평생을 함께하게 된다. 보통 낭만주의 시대의 예술가들은 죽음 자체에 매료되어 관련된 작품들을 많이 남겼는데, 라흐마니노프는 우울감도 가지고 있었으니, 죽음이라는 주제는 그의 작품세계에 빈번하게 나타나게 된다. 그중 하나의 키워드가 바로 '진노의 날(Dies Irae)'인데, 이는 서방교회(가톨릭) 위령미사(Requiem)의 부속가(Sequentia)중 하나로 (바티칸 제2차 공의회 이후 현재의 위령미사 기도문에서는 삭제됨), 기도문은 다음과 같다.
Dies iræ, dies illa,
solvet sæclum in favilla,
Teste David cum Sibylla.
Quantus tremor est futurus,
quando judex est venturus,
cuncta stricte discussurus.
진노의날 닥쳐오면/다윗시빌 예언대로/세상만물 재되리라
온갖선악 따지시러/심판관이 오시는날/놀라움이 어떠하랴
"그분들의 진노가 드러나는 중대한 날이 닥쳐왔는데, 누가 견디어 낼 수 있겠느냐?" (요한 묵시록 6장 17절)
이 부속가는 세상이 끝나는 날 최후의 심판 때에 영혼에게 자비를 베풀어 달라는 기도문이다. 이 기도문을 바탕으로 작곡된 가장 유명한 곡은 바로 주세페 베르디(Giuseppe Verdi, 1813-1901)의 '레퀴엠(Requiem) 중 '진노의 날'.
라흐마니노프는 이 그레고리오 성가에 깊이 심취하여 있었고, 이 모티브는 그의 곡들에서 빈번히 나타난다. 파가니니에 의한 광시곡에서도 어김없이 이 모티브가 사용된다.
7 변주를 먼저 이야기 한 이유는 주제부터 변주 기법을 조금 이야기하고자 함이다. 파가니니 원곡의 주제는 다음과 같다.
하지만 이 조차도 으레 멜로디가 그렇듯이 여러 부가적인 음들과 리듬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라흐마니노프는 이것을 더 해체시켜 뼈대만 남긴 뒤 이것을 제1 변주로 사용한다.
하지만 음악적으로 보면 1 변주가 주제보다 한 층 더 아래에 위치하므로 곡은 인트로-제1변주-테마-제2변주-... 의 순서로 진행된다. 그 후 온갖 멜로디와 리듬과 화성을 변화시킨 후에 이 곡은 제18변주에서 절정을 이룬다.
전체 곡 중에서 제일 유명한 부분으로, 서정적인 멜로디와 화성이 아름다운 변주다. 하지만 처음 듣는 사람은 아마도 주제와 동떨어진 멜로디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제18변주의 멜로디가 만들어진 방법은 처음 주제를 위아래로 뒤집고 가 단조에서 내림 라장조로 전조한 것이다.
변화하는 단계는 다음의 영상을 참고하면 좋을 듯하다. (2:18-2:37)
이 곡과 병행하여 감상하면 좋을 곡은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독주를 위한 변주곡인 '코렐리 주제에 의한 변주곡, 작품번호 42번 (Variations on a Theme of Corelli, Op. 42)'. 이 또한 바이올린 곡을 주제로 작곡한 변주곡이고 파가니니 광시곡과 유사한 부분이 군데군데 존재한다. 이 곡에도 파가니니 광시곡의 제18변주 같은 부분이 존재하는데, 인터메초(Intermezz) 뒤에 나오는 제14변주와 15변주가 그것으로, 들을 때 각 변주마다 오케스트라 사운드를 상상하면서 감상한다면 더욱 풍부하게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연주자가 이러한 곡들을 연주할 때 오케스트라 사운드를 상상하며 연주한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주제에서 오케스트라 현악 파트 수석 들의 현악 4중주를, 앞서 말한 제14변주는 현악 오케스트라를, 그다음 제15변주는 플루트와 하프의 이중주를 상상하곤 한다.
오늘의 글은 요즘 손열음에 빠져있다는 분을 위하여 쓴 글로, 손열음이 연주하는 곡들을 좀 더 깊게 즐기고 싶다고 하여 파가니니 광시곡에 대한 간단한 설명과 그에 관련된 곡들을 (최대한) 손열음의 연주로 채워보았다. 그분의 예술 향유에 미약한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2020. 06. 27. 토. 빈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