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erfantasie

2019. 05. 29. Chartres, France

새벽에 일어나서 공항으로 향했다. 속으로 '내가 미쳤지. 이런 시각의 비행기를 예약하다니.'를 되뇌며. 다시는 이런 무모한 비행기표 사지 않으리라. (하지만 가격을 보면 다시 이럴 확률이 농후.) 부랴부랴 공항에 가서 면세점에서 바하우 지역의 화이트 와인을 사고 비행기에 타서 다시 잠을 청했다.

솔직히 파리는 가고싶지 않았다. 원래는 HY를 보러 영국에 갈 예정이었으나, 영국에 보고 싶은 것이 별로 없고 돌아오는 비행기표 시각은 지금 이 비행기 시각보다 더 말도 안 되었기 때문에, HY와 중간지점인 파리에서 만나기로 했다. HY는 토요일 아침에 도착한다고 했으니, 그동안 혼자 여유롭게 파리 근교를 여행할 것이다. 그런 생각으로 파리 근교에서 유학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 HY형에게 연락하니 파리로 옮겼단다. 기숙사를 내어주시는 자비로운 HY형.

파리 샤를 드 골 공항 3 터미널에 내렸더니, 파리 시내로 가는 기차를 타기 위해서는 밖으로 나와 걸어서 2 터미널로 가야 했다. 나비고 (Navigo)를 구입하기 위해 줄을 섰다. 거진 한 시간을 기다려서 보증금 EUR 5.00 포함하여 EUR 27.80을 내고 받은 카드에 여권사진을 붙였다. 나비고 일주일권도 그렇고, 빈 일주일권도 개시를 언제 하든 그 주의 일요일 혹은 바로 다음 월요일 아침까지만 사용 가능한데, 한국이라면 절대 도입되지 않을 계산법이겠지. 나는 수요일에 도착해서 일요일에 떠날 것이니 어쨌든 나비고를 구입.

지난주 빈에서는 그래도 이 주 살아서 대중교통 노선에 대한 감이 있었지만, 파리는 정말 생판 모르는 곳이라 구글 지도에 나를 맡기고 가야한다. 행선지는 몽파르나스 역 (Gare Montparnasse).

Gare Montparnasse17 Boulevard de Vaugirard, 75741 Paris (구글지도 링크)

RER B를 타고 가다 생 미셸 노트르 담 (Saint-Michel Notre-Dame) 역에서 M4로 환승하는데 이정표가 무슨... 파리 10년 전에 왔을 때에도 다시 오고 싶은 곳이 아니었는데 역시나이다. 어서 파리를 벗어나야 한다.

몽파르나스 역에 도착하여 짐을 맡기러 보관소에 들어가려 했더니, 공항처럼 소지품 검사를 한다. '이건 또 뭐야.' 하지만 더 충격적인 것은 들어가서 쓰는 보관함 기계는 오직 프랑스어로만 사용방법이 적혀있다는 것. 물론 그림을 보고 사용하는 데는 문제가 없지만, 파리 같은 관광도시에서 이런 큰 역 물품보관소에 프랑스어로만 적혀있다는 건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다.

샤르트르 (Chartres)로 가는 표를 사고 (나비고를 통해 5 존까지 가서 그곳에서 샤르트르행 표를 사서 가면 돈을 절약할 수 있지만 나는 그냥 편리함을 위해 기꺼이 돈을 지불했다.), 바로 앞에 보이는 매장에서 빵과 디저트와 커피를 샀다. 아! 그래도 프랑스가 빵은 최고다. 버터가 뭉텅뭉텅 들어간 프랑스식 빵이 제일 맛있다. 입에서 오는 행복감과 파리에 대한 짜증을 동시에 느끼며 기차를 기다리는데, 열차 출발시간 20분 전인데도 플랫폼이 안 뜬다. 10분 전에도 안 뜨고, 나의 머릿속에는 '설마 플랫폼이 이 층이 아니라 다른 층인가?' 하는 걱정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결국 7분 전에 안내 방송이 나오더라. 프랑스 정말 적응 안된다.

샤르트르 역에 내려서 시내 쪽으로 조금만 걸어가면 샤르트르 성모대성당 (Cathédrale Notre-Dame de Chartres)이 눈 앞에 보인다. 이정표가 없어도 그냥 걸어갈 수 있을 정도. 들어가기 전에 대성당 앞 벤치에서 아까 사둔 초콜릿 파이를 먹으며 바람을 쐰 후 본격적으로 대성당 외부벽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Cathédrale Notre-Dame de Chartres16 Cloître Notre Dame, 28000 Chartres (구글지도 링크)

Cathédrale Notre-Dame, Chartres

아! 모든 문이 정교한 조각들로 장식되어있다. 전하려는 메시지도 분명하다.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세우시고 사도로부터 내려오는 거룩한 교회로 들어가는 문. 조각들을 감탄하며 대성당 뒤 정원으로 넘어가니 십대 아이들이 친구의 생일을 깜짝 축하해주고 있었다. 아름다운 날씨와 즐거운 광경. 대성당 뒤를 돌아 나오는 철제 문이 아름다워 계속 보고 있게 만들었다.

Cathédrale Notre-Dame, Chartres

반대편과 같이 정교하게 조각된 문들을 지나, 정문으로 들어가니 입이 벌어진다. 이렇게 아름다운 성당은 처음이다. 빛으로 가득한 장엄한 성당. 나에게는 바티칸의 산 피에트로 대성전보다도 훨씬 아름답고 장엄하게 느껴졌다.

Cathédrale Notre-Dame, Chartres

우선 오른쪽 측랑부터 천천히 구경하기 시작한다. 중앙 벽제대를 둘러싸고 예수의 생애를 표현한 조각 벽이 있다. 성 가브리엘 대천사가 동정녀 마리아에게 수태고지를 하는 장면, 어린 예수가 예루살렘 성전에 있는 장면부터 시작해서 빈 무덤을 발견한 제자들 등등.

Cathédrale Notre-Dame, Chartres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는 예수. 조각들이 정말 섬세하다. 장면 장면마다 감동하며 복원 중인 곳을 지나고, 부활하신 예수를 본 다음, 승천하시는 예수를 보는데, 너무 귀엽게 표현해서 웃을 수밖에 없었다.

Cathédrale Notre-Dame, Chartres

하늘로 올라가시느라 반 잘리신 예수. 이렇게 표현하는 건 처음 봤다. (회화에서 액자 바깥으로 나가시는 예수를 그린 작품이 있나?)

샤르트르 성모대성당은 당연히 바티칸 제 2차 공의회 전에 지어진 대성당이니 그 때까지는 주제대가 이 조각벽에 둘러 쌓인 벽제대였을 테지만, 전례개혁 후 신자들과 사제석 사이에 놓여진 큰 제대가 오늘날 주제대로 쓰이고 있다. 사제석과 조각벽으로 둘러쌓인 옛 주제대 앞은 이 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조용히 기도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어 두었다. 이 또한 다른 대성당에서는 볼 수 없었던 부분이라 감동할 수 밖에 없었다.

Cathédrale Notre-Dame, Chartres

샤르트르 성모대성당은 언급했듯 아직까지 복원 중에 있는데, 복원 전과 비교하기 위하여 기둥의 일부분을 복원 전 상태로 남겨두었다. 대성당이 하얀빛으로 빛날 수 있는 것은 신랑을 모두 복원했기 때문인데, 아직 조각벽의 일부분과 측랑 및 익랑은 복원되지 않았다. 모든 내부가 복원되면 지금보다 더 빛으로 가득 찰 테니 훨씬 장엄하고 아름다울 것이다. 복원이 완료되면 꼭 다시 와야 할 곳.

대성당에서 나와 피카시에트의 집 (Maison Picassiette)으로 느릿느릿 걸어갔다. 대도시에서 벗어났는데 빠르게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주위 경치를 둘러보며 여유를 가지려고 노력했다.

Maison Picassiette22 Rue du Repos, 28000 Chartres (구글지도 링크)

Maison Picassiette, Chartres

피카시에트는 그릇을 훔치는 자, 혹은 피카소 그릇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샤르트르의 도로 보수원과 묘지 청소부로 일했던 레이몽 이시도르 (Raymond Isidore)가 평생 동안 버려진 도자기와 깨진 향수병으로 자신의 집을 모자이크로 꾸며, 이 곳에 자신만의 도시를 만들었다. 버려진 조각들에 생명력을 불어넣은 평범한 사람의 노력.

피카시에트의 집을 나와 느릿느릿 샤르트르 시내로 걸어가다 보니 외르 강가 공원 (Parc des Bords de L'Eure)에 들어가게 되었다.

Parc des Bords de L'Eure14 Rue du Faubourg la Grappe, 28000 Chartres (구글지도 링크)

Parc des Bords de L'Eure, Chartres

평화로운 공원을 거닐다가 생 피에르 성당 (Église Saint-Pierre)과 생 태냥 성당 (Église Saint-Aignan)을 구경하고 샤르트르 역에서 다시 파리로 가는 기차를 탔다. 이제 HY형을 만나러.

Cité Internationale Universitaire de Paris17 Boulevard Jourdan, 75014 Paris (구글지도 링크)

파리 대학들의 학생들이 거주하는 국제기숙사. 짐을 풀고 맥주를 마시며 캠퍼스를 산책했다. 파리에서 부지를 내어주고 각 나라에서 건물을 지었다고. ('무슨 도둑놈 심보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내가 모르는 거래가 있었겠지.) 스위스관은 그 유명한 르 코르뷔지에 (Le Corbusier)가 필로티 형식으로 지었고, 일본관은 일본 목조건축 특유의 지붕이 올려져 있고 교토에서나 볼 법한 작은 정원이 문 앞에 있다. HY형이 머물고 있는 한국관은 사괘를 상징하는 비대칭적인 선으로 벽면을 만들고, 태극의 두 색으로 내부를 칠해두었다. HY형과 빈에서 사온 바하우 화이트 와인을 마시며 오랜 회포를 풀었다.

파리는 예상대로 짜증이 치미는 곳이었지만, 샤르트르는 기대 이상으로 좋았다. 샤르트르 성모대성당도, 피카시에트의 집도, 평화로운 마을을 거닐었던 것도. 프랑스에 오길 잘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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