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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hubert Geburtshaus und Schubertkirche (슈베르트 생가와 슈베르트 성당)
Sam. 03. Okt. 2020.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는 잘츠부르크(Salzburg)에서 태어나서 빈(Wien)에서 세상을 떠났다. 루트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은 본(Bonn)에서 태어나 빈에서 생을 마감했다. 요제프 하이든(Joseph Haydn)은 빈에서 활동했지만, 로라우(Rohrau)에서 태어나고 죽었다. 그 시대에 빈에서 활동하며 음악사에 큰 획을 그은 작곡가들 중, 빈에서 태어나 빈에서 활동하고 빈에서 생을 마감한 진정한 비너(Wiener)는 프란츠 슈베르트(Franz Schubert)가 유일하다.
현재의 빈은 23개의 구(Bezirk)로 이루어져 있다.
이 중 1구-인네레 슈타트(Innere Stadt)-가 성 스테파노 대성당(Stephansdom)과 왕궁(Hofburg)이 있는 본래부터 빈이었던 곳이고, 후에 교외에 있던 지역들을 하나씩 흡수하여 지금과 같은 모습을 이루게 되었다. 슈베르트의 생가(Schubert Geburtshaus, 슈베르트 게부르츠하우스)와 슈베르트 성당(Schubertkirche, 슈베르트키르헤)은 현재의 9구 알저그룬트(Alsergrund)에 위치하고 있다.
프란츠 페터 슈베르트(Franz Peter Schubert)는 1797년 1월 31일 힘멜포트그룬트 72번지(Himmelpfortgrund 72)-현재 누스도르퍼 슈트라세 54번지(Nußdorfer Straße 54)- '춤 로텐 크렙센(Zum rothen Krebsen, 붉은 가재)'이라 불리는 곳에서 프란츠 테오도르 플로리안 슈베르트(Franz Theodor Florian Schubert)와 마리아 엘리자베트 카타리나 비츠(Maria Elisabeth Katharina Vietz)의 14남매 중 열두 번째로 태어났다.
Wien Museum Schubert Geburtshaus, Nußdorfer Str. 54, 1090 Wien (구글 지도)
슈베르트의 아버지는 보통학교(Trivialschule)의 교장으로, 이 집의 1층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슈베르트 가족은 이 아파트먼트의 부엌과 거실이 있는 가장 크고 비싼 방들 중 하나에서 머물렀을 것으로 추측된다.
슈베르트 생가엔 가족들의 초상화들과 악보들과 편지 몇 점만이 있기 때문에, 가장 눈에 띄는 소장품은 아무래도 프란츠가 직접 쓰고 다니던 안경일 것이다. 안경을 썼던 대작곡가들이 얼마 없기 때문에 아무래도 더욱 눈에 띄는 바로 그 슈베르트의 안경.
옆 방(본래 슈베르트 가족의 것이 아니었던)에는 피아노가 놓여 있는데, 이 피아노는 빈에서 제작된 피아노로 프란츠의 형인 이그나츠(Ignaz)의 것이다. 프란츠는 형인 이그나츠에게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는데, (당연하게도) 몇 달만에 프란츠의 실력은 형의 그것을 앞질러 버렸다고 한다.
학생들이 많아지자 프란츠가 태어나고 4년 뒤 1801년, 그의 가족은 근처의 힘멜포트그룬트 10번지(Himmelpfortgrund 10)-현재 소일렌가세 3번지(Säulengasse 3)-로 이사한다. 프란츠는 이 힘멜포트그룬트 10번지에서 오랜 시간 살았는데, 현재 이곳은 자동차 정비소로 바뀌어있고 이 위대한 음악가의 흔적은 자동차 정비소의 이름과 건물에 붙어있는 현판에서만 찾을 수 있다.
Schuberthaus, Säulengasse 3, 1090 Wien (구글 지도)
Franz Schubert hat dieses Haus vom Jahre 1801 an durch eine lange Reihe von Jahren bewohnt. Hier als Schulgehilfe seines Vaters gewirkt und zahlreiche unvergangliche Werke darunter den 'Erlkönig' geschaffen.
프란츠 슈베르트는 1801년부터 많은 햇수를 이 집에서 보냈다. 이곳에서 그의 아버지의 학교 교생으로 일하였고, '마왕'을 비롯한 수많은 불멸의 곡들을 창작했다.
프란츠는 태어난 다음날 가톨릭 교회에서 세례를 받는다. 속칭 슈베르트 성당으로 불리는 리히텐탈 열네 명의 거룩한 조력자 교구 성당(Lichtentaler Pfarrkirche zu den heiligen vierzehn Nothelfern, 리히텐탈러 파르키르헤 추 덴 하일리겐 피어첸 노텔페른)에서 1797년 2월 1일에 세례를 받았다. 슈베르트의 부모도 이곳에서 1785년에 혼인 성사를 올렸고, 리히텐탈 152번지(Liechtental 152)-현재 바트가세 20번지(Badgasse 20)-에 신혼집을 차렸었다.
Katholische Kirche Lichtental (Hl. 14 Nothelfer), Marktgasse 31-35, 1090 Wien (구글 지도)
Franz Schubert wurde in dieser Kirche 1797 getauft und wirkte hier als ausuebender und schaffender Kuenstler.
프란츠 슈베르트는 1797년에 이 성당에서 세례를 받았고 연습 예술가 및 직업 예술가로 봉직했다.
프란츠는 일곱 살이 되자 리히텐탈 성당의 오르가니스트이자 합창지휘자인 미하엘 홀처(Michael Holzer)로부터 피아노와 오르간, 숫자 저음 교육을 받기 시작했는데, 홀처는 종종 프란츠의 아버지에게 눈물이 가득 찬 눈으로 '슈베르트와 같은 학생은 만나본 적이 없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선생은 자신의 학생이 하늘이 내린 천재라는 것을 알았는지, 프란츠가 그가 가르치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은 프란츠에게 아무것도 가르친 것이 없다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곧, 프란츠는 빈의 대음악가 안토니오 살리에리(Antonio Salieri)에게 보다 심화된 음악교육을 받게 된다.
슈베르트가 연주하던 오르간은 부분적으로 남아있다. 원본은 1774년에 빈의 오르간 제작자 요한 미하엘 판츠너(Johann Michael Panzner)가 제작한 것으로, 이것을 기초로 1984년에 성 플로리안 오르간 제작 학교(Orgelbauenstalt St. Florian)가 약 2000개의 파이프를 본래에 있던 케이스에 교체해 넣으면서 완성된 것이다.
당시 오스트리아에서는 남성의 군 복무가 의무였다. 프란츠는 17살이 되던 해(1814년), 아버지 학교의 교생으로 대체 복무하며 본격적인 작곡 활동을 시작한다. 그 해에 프란츠는 리히텐탈 성당 건립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그의 첫 번째 미사곡 F major, D 105 (Messe in F-Dur, D 105)를 위촉받아 작곡하고, 초연은 같은 해 9월 25일 리히텐탈 성당에서 이루어졌다. 62명의 연주자가 참여하였으며, 형 페르니단트(Ferdinand)가 오르간, 스승 홀처가 합창단을, 당대의 명 바이올리니스트 요제프 마이세더(Josef Mayseder)가 악장을 맡았으며, 프란츠가 직접 지휘했다.
F. Schubert - Messe Nr. 1 in F-dur, D 105
이때 프란츠는 소프라노를 부른 테레제 그롭(Therese Grob)에게 반해 결혼하고자 하였으나, 당대의 결혼법과 프란츠의 내성적인 성격 때문에 결실을 맺지 못하였다.
이듬해 1815년에는 미사곡 G major, D 167 (Messe in G-dur, D 167)과 B flat major, D 324 (Messe in B-dur, D 324)를 작곡했고 초연은 아마도 리히텐탈 성당에서 이루어졌을 것이라 생각된다. (가곡 '마왕 D 328 (Erlkönig. D 328)', '들장미 D 257 (Heideröslein, D 257)'가 작곡된 때도 이때이다.) 1816년에는 미사곡 C major, D 452 (Messe in C-dur, D 452)를 작곡하여 첫 스승 홀처에게 헌정하였다. 이 곡의 초연 또한 리히텐탈 성당에서 이루어졌을 것이라 추측된다. 프란츠 슈베르트는 평생 6곡의 미사곡과 '독일어 미사곡(Deutsche Messe, D 872)'이라고 불리는 성가 모음집을 작곡하였는데, C major 미사곡 이후의 A flat major 미사곡(Messe in As-dur, D 678)과 E flat major 미사곡(Messe in Es-dur, D 950)은 생전에 연주되지 못하였다.
Franz Schubert - *COMPLETE* Masses (with score)
www.youtube.com
이렇게 프란츠 슈베르트는 빈 근교 힘멜포트그룬트에서 태어나 19살(1816년)에 친구 프란츠 폰 쇼버(Franz von Schober)의 초대로 그의 어머니의 집에 머물게 될 때까지 이곳에서 지내며 리히텐탈 성당에서 네 곡의 미사곡을 초연하고 다섯 곡의 교향곡 및 다수의 성악곡을 작곡한다.
F. Schubert - Symphonie Nr. 5 in B-dur, D 4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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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alienische Nationalkirche Maria Schnee (눈의 마리아 이탈리아 국립성당)
Sam. 13. Jun. 2020.
오늘은 연구소에 가기 전에 눈의 마리아 이탈리아 국립성당(Italienische Nationalkirche Maria Schnee, 이탈리에니셰 나치오날키르헤 마리아 슈니), 다른 이름으로는 작은형제회 성당(Minoritenkirche, 미노리텐키르헤)이라고 불리는 성당을 들렀다.
Wiener Minoritenkirche, Minoritenplatz 2A, 1010 Wien (구글 지도)

1224년 오스트리아 공국(Herzogtum Österreich)의 레오폴트 6세(Leopold VI)는 꼰벤뚜알 작은형제회(Ordo Fratrum Minorum Conventualium)를 빈으로 부르고 수도원 부지를 내어준다. 그 이후 공위 시대(Interregnum)에 오스트리아를 장악한 보헤미아의 왕 오토카르 2세(Ottokar II)가 주춧돌을 놓음으로써 현재 성당의 모체가 지어지게 된다. 이 성당이 제 명칭보다는 작은형제회 성당이라고 불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 이후 합스부르크 시대, 마리아 테레지아(Maria Theresia)의 아들 요제프 2세(Joseph II)의 종교정책에 따라 작은형제회는 현재의 알저키르헤(Alserkirche) 위치에 빈의 작은형제회 삼위일체 성당(Dreifaltigkeitskirche der Minoriten in Wien, 드라이팔티히카이츠키르헤 데어 미노리텐 인 빈)과 수도원을 지으며 이사하게 되고, 1784년 요제프 2세는 본래의 작은형제회 성당을 이탈리아인 신자들의 관할로 넘기고 이름을 이탈리아 국립성당(Italienische Nationalkirche)으로 바꾼다.

주제대의 성화는 이그나츠 운터베르거(Ignaz Unterberger)의 작품으로, 성화 안에서 천사들이 또 다른 성화를 공경하고 있는 모습이다. 이 그림 속 성화의 원본은 이탈리아 로마의 크신 성모 대성전(Basilica Sanctae Mariae Maioris)의 보르게세(Borghese) 경당에 있는 로마 시민들의 수호자(Salus Populi Romani, 아마도 로마에서 제일 오래된 성모 이콘)로, 이 전체 성화는 크신 성모 대성전을 공경하기 위한 작품이다. 크신 성모 대성전의 전설을 아는 사람이라면 이 대목에서 왜 이 이탈리아 국립성당에 눈의 마리아라는 별칭이 붙게 되었는지 단번에 알아챌 것.




주제대의 양 옆으로는 네 개의 조각상이 서있는데, 왼쪽에는 헝가리의 성 스테파노, 세례자 요한, 오른쪽에는 사도 요한과 앞서 말한 레오폴트 6세의 조각상이 서있다.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Sanctus Franciscus Assisiensis)를 나타내는 여러 점의 작품들이 이 성당이 본래 작은형제회의 소속이었다는 것을 나타낸다. 물론 프란치스코 성인도 이탈리아인이라 이탈리아 국립성당과의 괴리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지만.

레오폴트 6세의 조각상 옆에는 피에트로 메타스타시오(Pietro Metastasio)의 묘비(Grabmal)가 있는데, 메타스타시오는 로마 출신의 시인이자 극작가로, 빈의 궁정 시인으로 봉직한 후 미카엘 성당(Michaelerkirche, 미하엘러키르헤)에 묻혔다. 묘비의 하단에는 임종을 앞둔 메타스타시오에게 병자성사를 행하는 교황 비오 6세(Pius VI)와 하이든, 살리에리, 모차르트가 조각되어있다. 이 세 작곡가가 출현하는 이유는 바로 이들이 메타스타시오의 작품으로 곡을 썼기 때문. 모차르트 티토 황제의 자비(La clemenza di Tito, KV 621)의 원작이 바로 메타스타시오의 것이다. (비록 모차르트는 카테리노 마졸라, Caterino Mazzolà가 개작한 판을 썼지만...)

이 성당에서 제일 눈에 띄는 것은 뭐니 뭐니 해도 대리석 모자이크로 만들어진 최후의 만찬(L'Ultima Cena) 모작이다. 이탈리아 밀라노에 갔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éon Bonaparte)는 은총의 성모 성당(Chiesa di Santa Maria delle Grazie) 수도원 식당에 있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의 프레스코화 최후의 만찬을 보고 깊게 감명받아 떼 오려고 했으나 당연히(!) 프레스코화를 뗄 수 없었고 그 대신 쟈코모 라파엘리(Giacomo Raffaelli)에게 모작을 만들도록 한다. 라파엘리는 프레스코화 대신 대리석으로 모자이크화를 만드는 방식으로 실물 크기의 최후의 만찬을 만들어낸다. 나폴레옹은 실각으로 이 작품의 완성을 볼 수 없었고, 대신 오스트리아의 황제 프란츠 1세(Franz I)가 구입하여 이 작품이 빈에 오게 되었다. 프란츠 1세는 이 작품을 벨베데레 궁전(Schloss Belvedere)에 전시할 계획이었지만, 크기 문제로 결국 이 눈의 마리아 이탈리아 국립성당에 설치하였다. 원본과 다른 점이라면, 원본은 프레스코화 특성상 시간이 지남에 따라 훼손될 수밖에 없는데, 이 작품은 대리석 모자이크라 그때의 색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눈의 마리아 이탈리아 국립성당의 오르간은 현재 연주 불능 상태이다. 2개의 매뉴얼, 20개의 스톱을 가지고 있는 이 오르간은 1786년 요한 밀라니(Johann Milani)와 페르디난트 헤첸도르프(Ferdinand Hetzendorf)가 1673년의 프란츠 크사버 크리스토프(Franz Xaver Christoph)의 오르간을 기반으로 만든 것이다. 1972년에 아르눌프 클레벨(Arnulf Klebel)이 부분적으로 복원한 것 외에는 원형을 거의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현재 복원을 위한 모금 진행 중.


눈의 마리아 이탈리아 국립성당의 종탑은 원래 첨탑이었으나, 두 번의 오스만 제국과의 공방전에 파괴되어 현재는 평평한 지붕만이 얹혀 있다.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는 오스트리아 시골 출신으로, 악마로 변모하기 전에는 화가를 꿈꾸며 빈에서 그림을 그렸었다. 빈 미술학교에 지원했지만 번번이 낙방했던 그가 빈에서 그린 그림 중의 하나가 바로 이 성당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 그림은 2015년 독일의 경매에서 다른 히틀러의 그림과 함께 중국인 수집가의 소유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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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ia am Gestade (물가의 마리아)
Sam. 06. Jun. 2020.
성 루페르토 성당(St. Ruprechtskirche, 상크트 루프레히츠키르헤) 바로 근처에는 물가의 마리아(Maria am Gestade, 마리아 암 게슈타데)라는 이름의 성당이 있다.
Katholische Kirche Maria am Gestade, Salvatorgasse 12, 1010 Wien (구글 지도)
물가의 마리아라는 이름은 이 성당이 예전 도나우 강의 가파른 제방 위에 지어진 데에서 비롯하였다. 티퍼 그라벤(Tiefer Graben, 깊은 참호)에서 성당이 있는 살바토어가세(Salvatorgasse, 구세주길)에 가려면 계단을 올라야 하는데, 이 때문에 계단 위의 마리아(Maria Stiegen, 마리아 슈티겐)이라는 별칭이 붙었다.
전설에 의하면 성모신심이 깊은 어부들이 882년 이 곳에 목조 경당을 지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1154년에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개축되었고, 1276년에 개조되었다. 그 후 1357년에 프랑스 고딕 양식의 내진(Chor)이 지어졌고, 1414년엔 신랑(Langhaus)과 덮개(Baldachin)가 씐 입구가 만들어졌다. 이 성당도 성 루페르토 성당 못지않게 빈의 오래된 성당들 중의 하나라, 빈에서 첫 번째로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된 성당의 영예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성당의 관할은 안정되지 못하고, 독일 파사우(Passau) 교구와 (빈 교구가 세워진 이후에도!) 베네딕토회 소속의 빈 스코틀랜드 성당(Schottenkirche, 쇼텐키르헤), 그리고 빈의 중산층 집안 사이에서 이리저리 넘겨졌다. 현재는 구속주회(Congregatio Sanctissimi Redemptoris, C.Ss.R.) 소속의 성당.
정문의 덮개에는 알베르트 노이하우저(Albert Neuhauser)의 1901년 작품인 세 점의 모자이크화가 있다. 왼쪽부터 순서대로 '수태고지', '피에타', '천사들의 여왕이신 거룩한 동정녀 마리아'. 문 옆의 조각상들은 왼쪽부터 순서대로 '바오로', '세례자 요한', '아빌라의 데레사', '예로니모', '레오폴도', '안나', '요셉', 베드로'.
이 성당의 재미있는 점은, 여느 성당과는 다르게 신랑이 똑바르지 않고 굽어있다는 점과 폭이 내진보다 좁다는 것이다. 이렇게 굽어진 성당은 처음이라, 처음 들어갔을 때 착시인줄 알고 순간 당황했었다. 제한된 공간에서 성당을 지으려니 이렇게 되었다고 한다.
이 이콘의 원본은 이탈리아 로마에 있는 구속주회 소속의 성 알폰소 데 리구오리 성당(Chiesa di S. Alfonso De Liguori)의 것이다. 1820년부터 구속주회 회원들이 물가의 마리아에서 봉직하였기 때문에 이 제대 말고도 구속주회와 연관된 다른 두 경당-성 알폰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S. Alfonso Maria de Liguori) 제대와 클레멘스 제대-이 있다.
이 르네상스 양식의 주제대는 1520년에 지어진 것이다. 주제대의 바로크식 성모상은 이 성당의 주보성인인 '원죄없이 잉태된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 즉, 12월 8일이 이 성당의 축일이다.
제대에서 신랑을 바라보면 멀리 오르간이 보인다. 1911년에 잘츠부르크의 오르간 제작자 마테우스 마우라허 2세(Matthäus Mauracher II)가 지은 것으로, 그전에 있던 요한 라흐마이어(Johann Lachmayr)와 프리드리히 도이치만(Friedrich Deutschmann)의 오르간, 그리고 내진에 있던 바로크 오르간의 파이프들을 재사용하여 만들었다고 한다. 즉, 파이프 자체는 빈에서 상당히 오래된 파이프들이라는 것. 네오고딕 양식의 외관은 도이치만의 것에서 기초한 것이고 2002년에 완전히 수리하여 현재는 후기 낭만 오르간의 소리를 낸다고 한다. (출처: 구속주회)
도나우 운하(Donaukanal, 도나우카날) 건너편, 2구 레오폴트슈타트(Leopoldstadt)에서 운하를 따라 자전거를 타고 가면 1구 시내(Innerestadt, 인네레슈타트) 건물들 위로 솟은 흰색 탑들을 보게 된다. 북쪽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다 보면 첫 번째 흰색 탑이 보이고, 순간 '성 스테파노 대성당(Stephansdom, 슈테판스돔)의 것인가?' 하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다가 더 남쪽으로 내려가 대성당의 타일 지붕과 함께 있는 두 번째 탑을 보게 되면 앞선 것이 대성당의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첫 번째의 탑은 바로 이 물가의 마리아의 탑인데, 착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 물가의 마리아 성당의 탑과 내진을 지은 사람이 바로 대성당을 지은 미하엘 크나브(Michael Knab)와 페터 프라하티츠(Peter Prachatitz)이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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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 Ruprechtskirche (성 루페르토 성당)
Sam. 06. Jun. 2020.
첫 행선지는 중요하다. 물망에 오른 행선지엔 성 스테파노 대성당(Stephansdom, 슈테판스돔)과 슈베르트 생가(Schubert Geburtshaus, 슈베르트 게부르츠하우스)가 있었으나, 슈베르트 생가는 코로나 사태로 인하여 6월 말까지 방문할 수 없고, 대성당은 공부를 더 한 뒤 자세히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성 루페르토 성당(St. Ruprechtskirche, 상크트 루프레히츠키르헤)을 첫 행선지로 잡았다.
Kath. Kirche St. Ruprecht, Ruprechtspl. 1, 1010 Wien (구글 지도)
왜 성 루페르토 성당이냐 하면, 바로 이 성당이 (아마도) 빈에서 제일 오래된 성당이기 때문이다. 전설에 따르면, 이 성당은 740년에 루페르토 성인(Heiliger Ruprecht, 하일리거 루프레히트)을 따르던 잘츠부르크(Salzburg)의 쿠니알트(Chuniald)와 기잘리히(Gisalrich)가 세웠다고 한다. 현존하는 기록 중 이 성당에 관한 제일 오래된 기록은 1200년에 하인리히 2세(Heinrich II), 즉 야소미어고트(Jasomirgott)가 스코틀랜드 성당(Schottenkirche, 쇼텐키르헤)을 아일랜드 베네딕토회에 선사하며 성 루페르토 성당이 빈에서 제일 오래된 성당이라고 언급한 것이다. 빈에서 제일 오래된 성당이니만큼 성 스테파노 대성당이 세워지는 1147년까지 빈 가톨릭 교회의 중심이었던 곳으로, 앞으로의 여행을 시작하는 곳으로 손색이 없다.
성당 안으로 들어가니, 안내원 혼자 계신다. 내가 성당 안에서 한참을 머무르자, 미소를 지으시며 간단한 설명이 담긴 종이를 주고 가신다. 성당은 작고 소박하다. 그리고 은근 현대적(?)이다. 740년에 지어진 원래 모습이 남아있을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지만, 조금 더 투박한 모습을 상상했었는데 말이다. 물론 여느 성당과 마찬가지로 불에 타고 개축하면서, 원래의 모습이 많이 바뀌었을 것이다. 1276년에 화재로 인한 손상을 입었다는 기록이 있고, 마지막은 제2차 세계대전. 그래도 빈의 다른 성당들에 비하면 거의 선사시대에 지어진 것과 같은 수준이다.
중당의 오른편 벽에는 루페르토 성상과 성모상이 있다. 왼편의 스테인드글라스(Buntglasfenster)는 리디아 로폴트(Lydia Roppolt, 1922-1995)의 1992-1993년 작품.
중당 뒷편에는 이탈리아 로마의 카타콤베에서 가져온 성 비탈리스(St. Vitalis)의 유해가 있다. 교황 클레멘스 13세(Clemens XIII)가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Kaiserin Maria Theresia)에게 선물한 것으로, 전승에 따르면 비탈리스 성인은 네로 황제 혹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시기에 라벤나(Ravenna)에서 순교했다고 한다. 성녀 발레리아(St. Valeria)의 남편이자 성 게르바시우스(St. Gervasius)와 성 프로타시우스(St. Protasius)의 아버지. (출처: 설명문, 가톨릭 성인)
빈에서 제일 오래된 성당답게, 후진(Apsis)의 스테인드글라스는 빈에서 제일 오래된 스테인드글라스이다. 대략 1300년 경의 작품으로 추정되며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 사도 요한'과 '왕관을 쓴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를 그렸다. 양쪽의 스테인드글라스는 하인리히 타헤들(Heinrich Tahedl, 1907-1985)의 1949년 작품으로 루페르토 성인의 활동을 그렸다.
제대에서 성가대석을 바라보면 심심한 벽 왼편에 작은 명판이 눈에 띈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프레데릭 3세(Frederick III)의 1439년 12월 6일 빈 입성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프레데릭 3세의 모토라고 한다. 전승에 의하면 라티움어로 "Austriae Est Imperare Orbi Universo" 혹은 독일어로 "Alles Erdreich Ist Oesterreich Untertan"을 뜻한다고 전해진다. 뜻은 "오스트리아가 전세계의 지배자다" 혹은 "전 세계는 오스트리아에 예속된다".
밖으로 나와 도나우 운하(Donaukanal, 도나우카날)을 바라본다. 성 루페르토 성당은 중세에 소금 사무소(Salzamt, 잘츠암트)로 사용되었는데, 이곳에서 소금의 품질검사를 한 뒤 구매자에게 분배했다고 한다. 이렇게 높은 곳에서 도나우 운하의 소금 상인 부두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
도나우 운하를 바라보는 곳에서 바로 뒤돌아서면 성 루페르토 성당의 탑이 있는데, 이곳에는 빈에서 제일 오래된 종이 있다. 1280년 경에 만들어졌다고 한다. 탑 아래에는 성 루페르토의 조각상이 있다.
사실 루페르토 성인은 가톨릭 교회에서 유명한 성인이 아니다. 나도 오늘 처음 들어본 성인. 그럼 대체 이 분은 어떤 분이시냐하면...
성 루페르토는 독일 보름스(Worms)의 주교로서 바이에른(Bayern)의 레겐스부르크(Regensburg)에서 선교사로 활동했다. 그의 활동 영역은 바이에른에서 도나우 강 지역까지 넓어졌고, 바이에른 공작으로부터 폐허가 된 유바붐(Juvavum)이라는 마을을 선물로 받아 주교가 직접 관할하는 도시를 세우게 된다. 성 루페르토는 마을의 소금 광산을 개발하여 도시를 건설하고, 그곳의 초대 교구장이 되어 마을의 이름을 직접 지었다고 전해지는데, 그 이름이 바로 '소금성'이라는 뜻의 잘츠부르크(Salzburg)다. 잘츠부르크의 수호성인. (출처: 가톨릭 성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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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enerfantasie: 빈 구석구석을 여행하다
코로나 판데믹 (Corona Pandemie).
오스트리아 연방정부는 사태가 심각해지자 국경을 닫아걸고 한 달 넘게 락다운을 했다. 락다운도 해제되고 오스트리아 내 확진 환자의 수도 진정세에 접어들었다. 오스트리아를 포함한 유럽연합의 국가들은 여름휴가 시즌을 맞아 서서히 국경을 열 준비를 하고 있지만, 과연 판데믹 시대에 어디 다른 나라를 여행하는 것이 과연 안전하고 옳은 일인가 싶었다.
학부 시절, 독일의 뮌헨공과대학교에서 교환학생 프로그램을 했었다. 내 전공과 관련된 과는 뮌헨 북쪽의 프라이징(Freising)이라는 작은 마을의 바이헨슈테판 캠퍼스(Campus Weihenstephan)에 있었기 때문에 나도 그곳의 기숙사에서 머물렀다. 뮌헨이라는 유명 도시에 가려진 프라이징의 자랑거리는 뭐니 뭐니 해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맥주 바이헨슈테판의 양조장일 것이다. 다른 하나는 전임 교황 베네딕토 16세(Benedictus XVI)인 요제프 라칭어 (Joseph Ratzinger) 추기경이 바로 프라이징 교구장 출신이라는 것. 프라이징 성모 마리아와 성 코르비니아노 대성당(Dom St. Maria und St. Korbinian)은 뮌헨-프라이징 대교구의 공동주교좌성당으로 라칭어 추기경이 봉직했던 곳이다.
그러나, 바이헨슈테판 맥주는 셀 수 없이 마셨음에도 양조장 투어는 하지 않았다. 심지어 기숙사가 바로 옆이었음에도. 프라이징 대성당은 프라이징을 떠나는 기차에 오르기 직전, 짐을 바리바리 싸들고 올라가 발도장만 찍고 나와야 했다. 그리고 나는 그 이후, 아직까지 프라이징에 다시 가보지 못하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사는 곳의 명소들은 언젠가는 가겠지라는 안일한 생각으로 잘 가지 않는다. 나 또한 그렇게 살아왔고, 지금 이곳에서도 빈의 명소들을 일부러 찾아가지 않았다.
하지만 상황이 바뀌고 씁쓸한 과거의 기억이 있으니, 이번에는 다르게 살아야한다. 틈이 나는 대로 빈의 명소들을 찾아가 보려 한다. 단, 여행 관련 서적에 나오는 유명한 명소들 보다는 나의 관심을 끄는 명소들 위주로 다녀볼 계획이다.
앞으로 작성할 글들에서 사용할 규칙을 몇 가지 소개하자면,
- 독일어는 대체로 외래어표기법을 따라 한국어로 옮기겠지만, 한국어로 옮겼을 때 오스트리아 독일어 발음과 크게 차이가 나는 것들은 임의로 옮길 예정이다.
- 성당의 이름과 같은 고유명사는 1.에 따라 옮기되, 가능하다면 뜻이 한국어로 번역된 것을 본문에서 사용할 예정이다. 단, 지명은 뜻을 병기하고 원어를 고수하며, 인명은 번역하지 않는다.
- 그리스도교에서 사용되는 용어들은 한국 가톨릭 교회에서 쓰는 용어를 기준으로 하며, 성인들의 이름도 독일어 원어와는 다르지만 한국 가톨릭 교회에서 쓰는 방식으로 통일한다.
빈 여행의 길잡이로 쓸 정보들은 다음과 같다.
- 박종호. "풍월당 문화 예술 여행 04: 빈". 풍월당.
- 정준극. "비엔나 워킹 투어: 중세의 골목길에서 만나는 영광의 역사와 예술 그리고 낭만". 한울
- 영문 위키피디아 (https://en.wikipedia.org/wiki/Main_Page)
- 정준극 블로그 (http://blog.daum.net/johnkch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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